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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으로 읽는 책] 사양

'작년엔 아무 일이 없었다./ 재작년엔 아무 일이 없었다./ 그 전 해 역시 아무 일도 없었다.' 이런 재밌는 시가 종전 직후 어느 신문에 실렸는데, 정말이지 지금 생각해 보면 여러 일이 있었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역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말에 공감하게 된다. 전쟁의 추억이란 건 말하기도, 듣기도 싫다. 사람들이 그렇게나 많이 죽었는데도 진부하고 지루하다.     다자이 오사무 『사양』   ‘아아, 돈이 없다는 것은 뭐라 표현해야 좋을지 모를 두려운, 비참한, 살아날 구멍 없는 지옥 같다는 걸 태어나 처음으로 깨닫고는 가슴속에서 뜨거움이 복받친다. 속이 꽉 메어와 울고 싶어도 눈물도 나오지 않는다. 인생의 쓴맛이란 이런 느낌을 두고 한 말이 아닐까. 천장을 바라보며 누운 나는 빳빳이 굳어 그대로 돌이 되어버렸다.’ 오래된 소설이 새롭게 또 나왔다. 전후 일본 ‘데카당스 문학’의 아이콘 다자이 오사무의 1947년작. 끔찍한 전쟁을 겪은 이들은 ‘아무 일 없었다’고 능청을 떨며 허무와 불안을 달랜다. 몰락한 귀족의 자제인 주인공 남매는 하나는 자살하고, 하나는 유부남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를 홀로 키우며 세상의 도덕률에 맞선다. ‘패전 후, 우리는 이 세상 어른들을 믿을 수 없게 되었다. (…) 혁명도 사랑도, 실은 이 세상에서 가장 좋고 맛있고, 그러니까 좋은 일이라서 어른들은 못된 심보로 우리에게 설익은 포도라 이르며 틀림없이 거짓말한 거라고 생각했다.’ 여전히 아름답고 우아한 소설이다. 단, 당대로선 파격적 여성상이겠지만 지금 독자에겐 남성 작가의 한계도 느껴진다.문장으로 읽는 책 사양 다자이 오사무 아이콘 다자이 자제인 주인공

2024-04-03

[문장으로 읽는 책] 작가의 마감

*월*일 고뇌를 자랑거리로 삼지 마라, 라는 지인으로부터의 편지./ *월*일 173센티미터의 털복숭이. 부끄러움 때문에 죽다, 그런 문구를 떠올리며 혼자서 낄낄 웃었다./ *월*일 말하지 않으면 슬픔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라고 했던가. 꼭 들어줬으면 하는 것이 있다. 아니, 이제 됐다. 그저…. 어젯밤 1엔50전 때문에 세 시간이나 그녀와 말다툼을 했다. 속상하기 그지없다.   나쓰메 소세키 외 지음     안은미 엮고 옮김 『작가의 마감』   굳이 작가가 아니더라도 마감에 시달려 본 사람들이라면 공감할 글들이 많다. 일본의 유명 작가들이 마감에 대해, 글쓰기에 대해, 작가라는 업에 대해 쓴 에세이들을 모았다. 받아들인 원고청탁을 후회하고 글이 잘 안 나가서 전전긍긍해하는 ‘평범한’ 모습들이다. 인용문은 다자이 오사무의 ‘번민 일기’의 일부다. 짧은 일기 글 안에 창작의 고통, 삶의 불안이 읽힌다. “*월*일 부끄럽고 부끄러워 견딜 수 없는 곳의 한가운데를,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로 찔렀다. 날아올랐다. 게다 신고 기찻길로! 한순간 장승처럼 우뚝 섰다. 풍로를 찼다. 양동이를 걷어찼다. 작은 방으로 가서 주전자를 장지문에! 장지문 유리가 소리를 냈다. 밥상을 찼다. 벽에 간장. 밥공기와 접시. 내 대신이다. 이 정도로 때려 부수지 않으면 나는 살아갈 수 없다. 후회 없음.”   결국 자살로 삶을 마감한 그는 또다른 글에서 “왜 사는가. 어째서 글을 쓰는가. 그것은 의무를 수행하기 위함”이라며 “사랑이란 결국 의무를 수행하는 일”이라고 썼다. 양성희 /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문장으로 읽는 책 마감 장지문 유리 번민 일기 다자이 오사무

2023-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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